제목 [공지] 동서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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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의사협회지 2005년 8월호 <시론>
글쓴이: 포천중문의대 전세일


<<시론>> 한의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

진실을 제대로 알면 이해이고 잘못 알면 오해이다. 우리 모두의 지적 생활은 이해와 오해의 연속이며 축적이다. 의료인 모두와 직·간접으로 얽혀 있는 한의학에 대한 이해와 오해는 어느 정도일까? 흔히 주고받는 질문은 이렇다. 한의학은 비과학적인가? 한의학의 과학적 연구는 불가능한가? 의료일원화는 한의학의 본질을 상실시키는가? 의(醫)는 하나이고, 의학(醫學)은 여러 개이며, 요법(療法)은 수 천 가지이다. 인술(仁`術)로서의 의(醫)는 하나일 뿐이지만, 인술을 서로 다른 접근방법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의학(醫學)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각각의 의학에서 사용하는 치료도구로서의 요법은 수 천 가지에 이른다는 뜻이다. 의술에 과학과 기술을 도입한 서양에선 전염병 퇴치와 외과적 수술이라는 치료의 측면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면서 현대적 서양의학으로 변모하였고, 원래부터 철학적 이론과 임상경험의 축적을 의학의 주축으로 삼고 있던 동양에서는 몇 천년 전래되어 오는 의술의 본태를 크게 변형시키지 않은 채 학문과 이론의 전통을 그대로 지키면서 문자 그대로 전통적 동양의학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약 300년 전부터 동서 문물의 교류가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면서 의학의 교류도 활발하게 된 셈이었다. 동양의학의 서양권으로의 진출은 미미하였으나 서양의학의 동양권으로의 진출은 매우 활발한 것이었으며 거의 일방적이면서도 빠른 속도로 주(主) 의학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서양의학의 전염병 퇴치 능력, 수술을 위주로 한 외과적 치료,신속하고 효율적인 응급조치의 우수성 때문이다. 과학 만능의 사고방식으로 충만되어 있는 서구사회에 비친 동양의학은 무조건 회의적 견해, 무조건 수용하려는 견해, 신중하고 객관적인 견해 등의 다른 시각으로 평가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래동안 동양의학은 비과학적이라 해서 무조건 배척해 오던 회의파의 세력이 너무 강하여 전혀 의미있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무조건 수용파의 의견도 근거도 없이 긍정적 주장을 편다는 이유로 동양의학의 진지한 보급 확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1970년대 초반부터 서양의학의 제한점에 대한 자체 내의 인식 대두, 침술 마취를 비롯한 일부 동양의학 시술의 효율성 노출 등이 신중한 객관파의 연구 의욕을 자극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오래동안 동·서의학이 공존하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도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지난 30여년 동안 객관적 연구자들에 의해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은 상호보완적인 측면이 있음을 상당히 밝혀냈고 지금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동·서의학의 차이점

서양의학과 동양의학 사이에는 실제로 중복되는 면도 많이 있고, 비록 서로 다른 면이 있더라도 그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두 의학의 공통된 개념이나 이론이라 하더라도 어떤 부분은 동양의학에서 더 강조하는가 하면 또 어떤 부분은 서양의학에서 더 강조하는 점이 따로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들을 차이점이라고 간주하여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지식체계의 바탕이 동양의학은 철학적이고, 서양의학은 과학적이다. 사람들에겐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들’과 ‘믿는 것만 보는 사람들’의 두 가지 부류가 있다. 과학자들에겐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경향’이 있고 철학자들에겐 ‘믿는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과학에선 ‘의심’을 학문의 먹이로 삼고 자라며, 철학에선 ‘믿음’을 먹이로 삼아 변화해 간다.

2) 동양의학은 총체적(holistic)인 이해, 서양의학은 분석적(analytical)인 관찰을 강조한다.

3) 치료 면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동양의학은 방어적(自를 補함)이고 서양의학은 공격적(他를 除去함)이다.

4) 동양의학은 경험적(experience)이고 서양의학은 실험적(experiment)인 면을 강조한다.

5) 동양의학은 역할(기능) 위주의 성(性)을 강조하고 서양의학은 해부학 위주의 질(質)을 강조한다. 물질의 성질이 질(質, 예: 단백질, 지방질, 당질, 광물질, 섬유질)이고, 비물질(非物質)의 성질이 성(性, 예: 음성, 양성, 경성, 연성,산성)이다.

6) 동양의학은 불건강 중심이고 서양의학은 병 중심이다. 동양의학에서는 사람의 상태를 건강과 불건강(不健康)으로 구분하고, 서양의학에서는 병과 무병(無病)으로 구분한다. 동양의학에서는 불건강의 증(證, 症)을 다스리고(care,manage) 서양의학에서는 병(病)을 처치(treat)하고 고친다(repair).

동양의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경락과 경혈’은 서양의학에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보이지 않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동양의학이건 서양의학이건 간에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믿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 몸 속에 내재하는‘자연치유력’이다. 우리 몸에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으면, 저절로 정상으로 되돌려 놓으려고 하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 치유력이 제대로 작동을 하면 건강한 것이요, 반대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불건강이요, 병이다. 이러한 자연 치유력이 몸의 특정한 부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지점들이 있다. 이런 예민한‘반응점’이 경혈이고 ‘반응선’이 경락인 셈이다. 수 천 년의 전통을 갖고 있는 동양의학에서는 바로 이‘반응점’을 자극함으로써 자연치유력을 활성화시키고, 활성화된 자연 치유력이 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유지시킨다는 이론을 굳게 고수하고 있다. ‘경혈’이라고 하는 반응점을 바늘로 자극하는 치료법이 침술이요, 작은 열로서 자극하는 것이‘뜸’이요, 누르는 압력으로 자극하는 것이‘지압’이요, 빨아내는 음압(陰壓)으로 자극하는 것이‘부항(附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바로‘자극’이다. 그래서 광선, 초음파, 레이저, 전기,자기 등의 새로운 에너지원을 사용하여도 같은 점을 자극하면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관찰하고 확인할 수 있는것이다. 최근에는 과학이 있기 전에 탄생한 동양의학의 옛 지혜가 과학이라는 도구로 그 신비의 베일을 벗어버리기 시작했다.

경혈을 자극하면 멀리 떨어져 몸 속에 깊숙이 있는 장기의 혈관이 확장되기도 하고 수축되기도 하여, 혈액 순환의 변화와 생리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경혈 부위의 피부는 전기 저항이 가장 낮은 지점이라는 사실이 역시 확인된다. 다시 말해서 전기의 전도성이 가장 높은 지점이라는 뜻이다. 또 침이나 뜸으로 경혈을 자극하면 여러가지 호르몬의 분비가 촉진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특히 통증이 있는 환자들에겐 통증을 없애는 엔도르핀이 분비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엔도르핀의 분비 때문에 특별한 약을 사용하지 않고 침만 가지고도 수술을 할 정도의 마취가 가능한 것이다. 침으로 동물을 마취시키고 수술을 할 수 있는 것을 보더라도 침의 효과가 심리적이거나 자기 암시라거나 최면 효과가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동서의학 협진(접목)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

1) 동양의학과 보완의학을 활발히 연구하고 있는 전 세계 추세에 발을 맞출 수 있다. 125개의 의과대학을 갖고 있는 미국에서는 100개 이상의 대학에서 정식 교과과정으로 채택하여 교육하고 연구하고 있다.

2) 지식의 폭이 넓은 의료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환자에게“나는 잘 모르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의사보다는 적어도“이래서 하지 말라”또는“저래서 하라”는 식의 권유는 할 수 있는 수준의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무한한 연구의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동양의학과 보완대체의학은 의과학 연구 발상(research idea)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4) 세계의학을 주도해 나갈“새 한국의학(韓國醫學)”을 창출해 낼 수 있다. 동양의학은 동양의학 대로의 장점과 단점이 있고, 서양의학은 서양의학 나름대로의 우수한 점과 동시에 많은 제한점을 지니고 있다.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장점만을 융합시킨다면 한 차원 높은 종합의학 또는 전일의학의 창출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의학의 창출을 위하여 세계에서 가장 좋은 여건을 한국이 갖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가슴 속에 장미빛 희망을 품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본다.

제 언

1) 참된 의학발전을 위해서는 서양의학과 동양의학 사이에 상호존중의 마음가짐이 선행되어야 한다. 상대방 의학에 대해서 모르면 모르는 것 만큼 존중해 주어야 한다. 상대방 의학을 배우고 알아야만 비판할 능력과 자격이 생긴다.

2) 서양의학과 동양의학 전문가들 사이의 선택은 갈등이 아니라 협력이어야 한다. 양쪽에서 굴을 파오다가 중간에서 만났으면 서로 부둥켜 안고 반가워해야지 싸워서야 되겠는가. 동양의학에서 전통적 침술이 점진적으로 개선되면서“심층 침술법”이 개발되었고, 서양의학에서 압통점과 유발점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IMS 치료법이 개발되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오다가 한 장소에서 만났다면 반갑게 악수라도 할 일이지 서로 삿대질을 해선 안될 일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협력을 한다면 서양의학에도 좋고, 동양의학에도 좋고, 국민들에게도 좋은 방법이 마련될 것이다.

3) 근거중심의학으로 전 세계인의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동·서의학의 공동연구가 필수적이다. 죽어가는 생명을 그저 구조해 놔두거나 생명의 길이만을 연장해 준다면, 참된 인술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결과가 될 뿐이다. “살 가치가 있는 생명”으로 만들어 준다는 철학이 의학 전 분야에 걸쳐 보편화 되어야 하고, 생명의 질을 향상시켜 주는 것이 의술의 목표여야 된다는 뜻이다. 생명학의 총론인 동양의학과 각론인 서양의학이 조화로운 접목을 이룰 때 생명의 질과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 훨씬 수월해 질 것이다. 한의학에는 과학적 방법론이 취약하고 서양의학에는 인간생리의 철학적 이해력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양의학의 역할은 동양의학의 과학적 연구에 서양의학의 노하우(know-how)를 동원하여 주는 것이다.

4) 제도적 용어에 집착하지 말자. 일부 관계자가 “의료일원화”란 용어 자체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구태여 “일원화”란 말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동·서의학 전문가들이 한데 어우러져 같이 환자를 진료하고 정답게 함께 연구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나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협진이나 접목은 환자가 원하고, 건강인이 원하고, 우리나라가 원하고, 세계가 원한다.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에 있어 접목의 시도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하되 서로가 이것 저것을 나누어 쓰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즉 기존의 모든 의학보다도 한 차원 높은 종합의학(또는 全一醫學)의 수준으로 개발하고 보급한다는 학문적·사회적·국가적 의욕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2011-03-13 03:37:29